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제주 4.3의 아픔
1948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역사의 흉터
박상연 기자
▲제71회 제주4.3희생자추념식에 앞서 한 유족이 표석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현기영, ‘순이삼촌’ 中

안성 4.1 실력항쟁이 이틀 지난 4월 3일 제주도 4.3 평화공원에서는 제주의 슬픈 역사를 마주하는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추념식이 거행됐다.

추념식에 앞서 유족들은 이곳을 찾아 위패와 표석을 깨끗이 닦으며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안타깝게 희생을 당한 이들을 그리며 눈물을 훔쳤다.

특히, 8살 어린 나이에 4·3을 경험한 김연옥 할머니의 외손녀 정향신(23)씨가 낭독한 할머니의 사연은 아픈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개인의 슬픔과 고난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추념식장 곳곳에서 유족과 제주도민, 참석자 모두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1948년 4월 3일 그 현장에 서있었다.

제주 4.3은 아직 모든 이들이 알고 있지 않은 사건이다.

하지만, 제주4.3의 그 실상을 확인하면 누구라도 꼭 기억하고 인정해야하는 역사적 사실이며 부정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 2009년 제주국제공항 제주4.3희생자 유해발굴 모습(제주도 4.3 평화공원 기념관 자료사진)

 

6.25전쟁을 내다본 ‘이념’의 마찰이 부른 참극

제주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뜻한다.

제주도는 이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정도인 2만5천명에서 3만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수치는 6.25전쟁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에서 자행된 가장 큰 학살극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또, ‘초토화작전’ 등으로 300여 마을, 2만여호, 4만여채 중산간마을 95%이상 소실됐다.

이를 확인하듯 제주도 4.3 평화공원에 안장된 희생자들은 제주 전역에서 생활했던 주민들이며, 당시 제주도는 온갖 핍박과 수모를 겪고 있었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제71회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삼다도(三多島) 제주도에서 자행된 4.3의 비극

제주4.3 사건는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에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쏘아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으며 발발하게 됐다.

이에 격분한 제주도민들은 1947년 3월 13일까지 민·관직장인(4만1천여명, 95% 추정)이 모두 함께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미 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해 파업 주도 세력 등 2천500여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이듬해 한국사회에서는 미국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고 유엔(UN)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했으며, 이를 반대하는 좌파 세력은 전국적으로 '2·7 투쟁'을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4.3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5.10 남한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4.3 무장봉기를 빌미로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1월 제주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제주 조천면 교래리 주민 30명 총살을 시작으로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거주시 무차별 학살, 중산간 마을 소개령 등이 담긴 초토화 작전은 3개월 가량 지속되며 대부분의 4·3 희생사건이 이 무렵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9년 3월 2일 정부와 미국은 제주도지구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김용주 대령의 독립 유격대대를 투입해 유격대의 잔존 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최후의 총공세를 감행하기도 했다.

▲제주도 4.3 평화공원내 봉안관 내부 모습 

 

명예회복과 정부적 차원의 진상규명이 절실한 제주4.3

제주 4·3 사건은 군사정권 때까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며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사건이라고 알려졌다.

이 당시 정부는 다른 논의를 허용하지 않아 실상을 알고 있어도 희생자들은 제주4.3에 대한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1980년대 후반 사회단체와 학계 일각에서는 제주4.3을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추며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성격 규정을 제시했다.

특히,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기도 했다.

이에 국무총리 소속으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고, 제주도에 '실무위원회'가 출범해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 작업이 이뤄졌다.

그리고 2003년 10월 말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드디어 국회는 2013년 6월 제주지역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4·3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4·3평화재단의 설립 목적에 ‘희생자 및 그 유족의 생활 안전 및 복지 증진’ 내용이 포함돼 평화재단을 통해 국가가 희생자 및 유족에게 생활지원금을 보조 등을 골자고 하고 있다.

또,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지난해 4월 3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추념식장을 찾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 당시 추념사를 통해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문 대통령이 강조했듯 제주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가 많다.

생존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배.보상, 수형인 명예회복, 완전하지 못한 행방불명희생자 유해발굴 및 신원확인, 미국의 책임문제, 정명 등 과제가 아직 산적해있다.

제주4.3 유족회는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4.3특별법 전부개정안에는 배·보상, 수형인 명예회복, 추가진상조사 등 위 과제를 해결할 핵심적인 조항들을 포괄하고 있다"며 "법률에 의해 배.보상과 불법재판에 의한 수형인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활발한 추가진상조사가 이뤄지면 미국의 책임문제나 정명 등이 가시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4.3특별법 개정은 71여 년의 시간동안 힘들고 마음 아픈 삶을 살아야만 한 4.3희생자와 유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시작점이 되야 한다"고 전했다.

또, 매년 4월 3일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피해를 입은 제주4.3 희생자들과 함께했던 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와 같은 역사를 잊지 안도록 해야 한다.

박상연 기자 sypark35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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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07 [15:13]  최종편집: ⓒ 안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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