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물의 마음
김정연
안성신문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과 모여 소꿉놀이를 자주 했었다. 아빠, 엄마, 동생 등의 역할을 정하고 주변에서 살림살이로 쓸 도구들을 모아 집을 꾸몄다. 장소가 놀이터라면 모래로 담과 벽을 쌓아 방을 나누고 각기 크기가 다른 돌들을 모아 주방도구로 썼다. 지천에 피어있는 잡초들로 반찬을 만들고 알록달록 상을 차렸다. 해가 빨갛게 몸을 달구고 지평선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도 집에 갈 줄 모르고 놀았다.


 볼이 발그레한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놀이의 여운을 마음에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은 아쉬운 나머지 저녁을 먹고 혼자 방에 앉아 놀이를 이어갔다. 그림책으로 벽을 세워 집을 짓고 베개에 수건을 둘러 상대역을 시켰다. 그럴 때면 내가 하는 말에 베개는 대답도 잘 하는 것이 마치 친구를 앞에 두고 노는 양 즐거웠다. 물론 12역이었지만. 그러다 잠에 들면 어김없이 잠꼬대를 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잠꼬대를 하는 나에게 말을 시켰고, 나는 잠이 든 채로 어머니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베개를 상대로 혼자 노는 모습이 안쓰러워 내게 한창 유행이던 마론인형을 사주었다. 그것은 내 유년의 가장 값진 보물이었고 언제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되었다.

 

 인형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믿었던 그때는 인형의 표정이 매일 달리 보였다. 머리는 금발에 크고 둥근 눈, 오똑한 코,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를 가진 멋진 서양의 숙녀였다. 그는 내가 수학시험을 망치고 온 날이면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기쁘면 그도 웃었고 내가 화내면 그도 화를 냈다. 나의 감정이 그에게 그대로 전이되는 듯 했다. 비록 생명이 없는 물체에 불과한 인형이었지만 나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었다. 열두 살 무렵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던 두 달 여의 외로운 시간을 함께 해준 것도 그 인형이다. 그 뒤 어떻게 그를 잃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형의 모양, 촉감, 눈빛, 표정 등은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며칠 전, 잠에서 깨어난 아침 늘 하던 대로 화장실로 가 변기에 앉았다. 잠을 깨려고 목을 아래위로 움직이고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고는 오랜 시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는데 벽에 걸려 있는 수건이 눈에 띄었다. 수건의 아래쪽에는 ○○○ 여사 팔순 기념이라는 검은 색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나는 ○○○이라는 사람을 몰랐다. 그 수건은 남편이 결혼 전 쓰던 것으로 나는 지난 사 년 동안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유독 그 날, ‘○○○이라는 이름이 눈을 파고 든 것이었다.

 

 남편에게 물으니 친한 후배의 할머니라고 했고 그 수건을 받은 건 십 여년도 더 훨씬 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수건은 십 년도 넘은 시간을 우리와 살아온 셈이었다. 사용한 세월이 길다는 사실에 묘하게 마음이 요동쳤다. 다행히 ○○○여사께서는 여전히 건강하다고 했다.

 

 그 후 그 수건을 볼 때마다 나는 본 적도 없는 할머니를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세탁을 하고 말린 수건들을 갤 때마다 그 수건은 이제 버려야겠다, 고 남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대답을 피하고 한 번만 더 쓰지, .’하고 얼버무렸던가. 새로 산 수건과는 달리 너무나 뻣뻣하여 몸을 닦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문구가 새겨진 부분은 나일론 재질로 되어 있어 면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후줄근해진 것과 달리 반질거렸다. ‘○○○할머니가 십여 년 전 팔순이었다면 지금은 나이 구순이 넘었을 터, 왠지 후줄근해지고 부드러운 기운이 없이 뻣뻣해진 부분이 그 할머니의 육체 같았다. 수건에 대해 연륜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경외심이 생겼다. 사물에 사람의 마음이 깃드는 순간이다. 이제 나는 그 수건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어릴 적 인형이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듯이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나를 위로해준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할머니가 어딘가에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는 소식이 이상한 안도감을 주었다. 얼마 전 아버지가 팔십 일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아직 내 곁에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일상 속에서 불현 듯 아버지의 존재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이다. 그럴 때면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눈물이 찡, 맺힌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고 할머니 수건의 문구처럼 아버지라는 이름은 반짝일 것이다. 수건을 볼 때 마다 생각한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김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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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13 [12:29]  최종편집: ⓒ 안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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