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바우덕이는 안성의 우상인가
조작된 신화 - 바우덕이의 실체를 묻는다 (3)
김한영


<연재목차> 

1. 글머리에 
2. 바우덕이는 실존인물인가  
3. 바우덕이는 대원군을 만나 옥관자를 하사받았는가 
4. 바우덕이는 꼭두쇠였는가 
5. 바우덕이는 매춘부였는가  

 
6. 바우덕이는 민중의 희망이었는가  
7. 바우덕이는 안성의 문화역사적 상징인가  
8. 안성에는 그렇게도 추앙할 인물이 없는가 
9. 글을 마치며




6. 바우덕이는 민중의 희망이었는가 

안성시는 지난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옥관자 바우덕이’가 조선후기인 1848년 태어나 1865년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았다고 주장, 홍보해왔다. 또한 이 ‘역사인물’이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이자 안성지방의 예능을 주도했을 만큼 기예가 뛰어났고, 1870년에 사망했다고 강변해왔다. 그러나 그런 ‘옥관자 바우덕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인정할 만한 근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점을 우리는 연재의 1편에서 확인했다. 

연재 2편에서는, 『남사당패 연구』라는 책자에 소개된 구술증언들로 미루어,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옥관자 바우덕이’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김암덕이라는 사람이 안성 청룡리에서 활동한 실존인물인 게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도 피력했다. 그러나 이 김암덕이라는 인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사당 단원이었긴 하되 어떤 주목할 만한 업적도 확인되지 않을 뿐더러, 역사와 문화의 지평에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진 ‘의미 없는 개인’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도 추론했다. 이런 사실에 대한 분별이 생기면 위의 질문 자체가 참 우스워진다.

그래서 ‘옥관자 바우덕이’가 민중의 희망이었는가 아닌가를 논하기보다 이 자리에서는 글쓴이의 앞선 두 편의 글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는 게 더 나을 듯하다. 대체로, 고증을 거치지 않은 안성시의 허황된 주장이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안성의 상징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물론, 글쓴이의 태도를 문제시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긴 하다. 이들의 반응은 대체로 네 갈래로 나뉜다 :

(1) ‘옥관자 바우덕이’가 조작됐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를 새삼스레 들고 나온 저의가 의심스럽다.

(2) 역사적 사실이 아니면 어떠냐,  ‘옥관자 바우덕이’는 지역에 전승되어온 문화적 자산이고 구비전승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

(3) 마케팅은 역사교과서와 다르다.

(4) 누가 뭐래도 ‘옥관자 바우덕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사료상의 근거는 없어서 제시하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입증해보이겠다.*

(1)의 입장에는 딱히 답할 게 없다. 저의를 의심하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 따른 가치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뭔가 저의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에게 아무리 없다고 해본들 입만 아플 노릇 아니겠는가.

(2)의 경우는, 이 글 말미의 각주**에서 경복궁에 갔다는 ‘옥관자 바우덕이’가 청룡리 사람들이 생득적으로 얻은 기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1990년 이래 안성시의 지속적인 홍보로 인해 ‘학습된’ 기억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그것을 구비전승이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에 달리 부연할 바가 없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그것이 전승이라 할지라도 시민들에게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라 말하고 또 아이들에게까지 역사적 사실로 가르치는 것과, 허구(구비전승)로 알고 허구로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김암덕이 아니라, ‘옥관자 바우덕이’의 경우는 1990년 『안성군지』에서 대대적으로 꾸며내기 이전의 시점에는 그 어디에서도 기록이건 구전이건 실체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1990년 이전에는 아예 안성지역에는 그런 인물에 관한 구비전승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옥관자 바우덕이’에 관한한 1990년 이후 청룡리에서 구술증언을 통해 채록한 내용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3)의 입장은 한편으로 흥미롭다. 글쓴이의 글이 마케팅 영역에서의 문제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 빠르게 제3자를 통해 내놓은 이런 반박이 제발 저린 반응이건 아니건, 글쓴이는 이런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역민들에게 돈이 되는 일이라는데 그게 사실이면 어떻고 허구면 어떤가. 역사의식이니 문화정신이니 하는 것들도 다 쓸데없는 췌언(贅言) 아니겠는가. 그렇다. 마케팅을 한다는데 춘향이면 어떻고, 심청이건 줄리엣이건 파우스트건 ‘옥관자 바우덕이’건 무에 대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하자. 이들 가공인물들과의 연고를 주장하는 남원이건 황주건 베로나건 라이프치히건 어느 도시도 소설 또는 구비전승에 등장하는 이들 가공의 인물들을 역사인물이라고 강변하지도 않으며, 역사인물로 둔갑시키기 위해 안성만큼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붓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역사인물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독 안성시만이 가공인물을 실존인물이라고 우기면서 ‘근거 없는 낭설’을 역사적 사실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가장 딱한 것은 (4)의 입장이다. 안성시가 이미 20년 전부터 바우덕이가 경복궁에 가서 대원군을 만났고 옥관자를 받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입증할 근거만 제시하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어렵게 풀어내려 하는지 글쓴이가 간여할 바는 아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길게 말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 개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다 드러난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학계 일반의 공통된 입장 또한, 적어도 안성시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옥관자 바우덕이’는 20년 전에 만들어진 허구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과거의 민중에게 희망을 주었는가를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질문이다.


7. 바우덕이는 안성의 문화역사적 상징인가

그 연장선에서 실체도 없는 ‘옥관자 바우덕이’가 안성의 아이콘이니, 심볼이니, 우상이니, 명품브랜드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 하면서 수백억 원의 세금을 들여가며 부각시키고 조명해온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같은 여성으로, 같은 시대를 안성에서 살았던 다른 두 여인의 경우를 두고 대비해보자. 

대부분의 안성 사람들에게 이름이 생소할 서순옥과 변매화 ― 이들은 김암덕과 동시대인 1910년대 안성에서 살았던 안성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읍내 동리(현재의 시청 인근)에서 날품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던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성장터에서 술과 노래를 팔던 기생이다.

안성 사람치고 양성과 원곡의 만세운동에 대해 커다란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는 없을 게다. 그러나 이 만세운동이 처음부터 양성과 원곡에서 시발된 건 아니다. 애초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안성에서 처음 만세소리가 울린 시점은 3월 11일로, 안성읍내에서 50여 명이 모인 소소한 만세사건이 있었으나 일경의 제지로 이내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보름이 넘도록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안성에서 지펴진 만세운동의 조그만 불씨는 영영 꺼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보름 이상이 지난 3월 28일에 접어들어 서순옥(徐順玉, 당시 36살)이 주동하고 나섰다. 비록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날품팔이로 사는 비천한 처지일망정 꺼져가는 만세운동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충정으로 서슬 퍼런 감시의 칼날을 피해 동네사람 20여 명을 모았고, 이들을 데리고 동리 뒷산(지금의 비봉산)으로 올라가 목청껏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초에 이르러 양성, 원곡, 죽산 일대에서 정점을 이루며 노도와 같이 퍼진 안성독립운동의 불씨를 이 여인이 극적으로 다시금 지펴낸 것이다.(『독립운동사 자료집 5』, 412쪽 참조).

▲  <사진 1> 1919년 4월 3일자 『매일신보』 기사  /  김암덕이 활동했던 당시인 1919년 4월 3일 발행된 『매일신보』 3면이다. 3월 29∼31일의 안성만세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3월 1일 경성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후[其後] 각 지방의 소요” 상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는데, 죽산과 양성 원곡에서 실력항쟁이 일어나기 직전 그 도화선 역할을 한 안성읍내에서의 만세운동과 시위상황을 비중 있게 다뤘다. 김암덕이 ‘안성 청룡’에서 ‘쌰당질’(社堂-)을 하고 있는 동안, 서순옥과 당시의 안성 기생들은 자신을 내던져 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로부터 90년이 지난 지금 김암덕은 ‘옥관자 바우덕이’로 포장되어 길이길이 추앙할 안성의 위대한 상징이 되었고, 자신을 내던져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동시대의 여인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는 이 없이 역사의 어둠 저 너머로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 김한영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운동의 추이를 더듬으면 흐름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각 단계마다 결정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안성의 독립운동도 예외는 아니다. 28일 보잘것없는 일용직 인부에 지나지 않았던 서순옥이 주도한 시위가 있었기에 당시의 안성 사람들에게 강한 자극을 줄 수 있었고, 그 다음날부터 <사진 1>의 『매일신보』 기사에서 보듯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김암덕과 동시대를 산 또 다른 여인인 변매화(卞梅花, 당시 20살)를 비롯한 안성기생조합 소속의 기생들인 리봉선(李鳳仙, 당시 19살), 송계화(宋桂花, 당시 26살), 고비연(高飛鷰, 당시 20살) 등이 앞장섰다. 이들 기생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은 양성 원곡을 포함한 안성의 만세운동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인원(3천 명)이 참가한 대규모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시위를 주도한 서순옥의 숭고한 자기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서순옥과 안성의 기생들이 없었다고 한다면 안성은 물론 죽산 일원에서의 만세운동이나 전국 3대 실력항쟁이라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양성 원곡에서의 만세운동의 불길은 아예 타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1919년) 안성에 살았던 김암덕과 그 패거리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만세운동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것을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고, 탓하고 싶은 생각도 추호도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김암덕과 그의 패거리들이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에서 “사당질”하고 있는 동안, 같은 시대를 산 다른 두 여인은 앞장서 안성 사람들을 추동하여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안성 사람들의 숭고한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떨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김암덕과 동시대인이고 그 신분 또한 일강(日强) 초기의 사회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서순옥과 변매화를 들고 나온 이유는 이런 동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이 지점에서 한번쯤 우리의 공동체적 삶, 그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고 성찰해보자는 취지다. 20년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린 배역자로 몰아붙이기 전에, 역사적 사실을 들고 나와 마케팅에 훼방을 놓는 불순한 모사꾼이라고 힐난하기 전에, 마케팅하는 데 역사가 어디 있고 민족이 어디 있느냐고 강변하기 전에, 안성시가 높이 평가하는 우리의 '전능하고 위대한' 뮤즈(muse) 바우덕이를 폄훼하려는 저의가 뭐냐고 따져 묻기 전에, 한번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거다.

우리가 갈고 닦은 역사의식과 문화감각이, 그 격과 수준이 고작 이 정도인가고 말이다. 이런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뭘 바랄 수 있겠는가고 말이다. 선열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으면서 ‘옥관자 바우덕이’가 안성의 유일한 역사적 인물인 양 가르치고 있는 우리 공동체가 과연 제 정신인가를 다시금 성찰하고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옥관자 바우덕이’는 날조된 가공인물이기에 기예를 논하는 게 사실 무의미하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존인물인 김암덕의 기예가 어느 정도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지만, 안성시의 주장처럼 기예가 높았다고 치자. 그러나 재주가 높다 한들 대체 얼마나 높단 말인가.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 지역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감연히 일어나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운 이들 열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보다 더 높단 말인가.


8. 안성에는 그렇게도 추앙할 인물이 없는가  

안성 관내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의 사회탐구활동 교과서 『우리고장 안성』(안성교육청, 2009, <사진 5> 참조)에서는 190여 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옥관자 바우덕이’만이 무려 3쪽에 걸쳐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물론 안성시가 만들어낸 가공인물을 그대로 수용해 집필한 결과물이다. 선구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서순옥과 변매화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수백억 원의 세금을 들여 김암덕을 ‘옥관자 바우덕이’로 날조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부족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까지 안성의 위대한 위인으로 ‘옥관자 바우덕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사진 2> 안성기(安城妓) 변매화 / 3ㆍ1운동이 발발하기 몇 개월 전에 간행된 『조선미인보감』에 소개된 안성기 변매화. 위 <사진 1>의 신문기사는 안성기생조합 소속 기녀들이 1919년 3월의 안성시위운동에 앞장섰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성을 원적(原籍)으로 한 사진의 변매화(卞梅花)는 1918년 안성기생조합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그러므로 사진의 변매화도 동료들과 함께 기생조합 기녀들이 주동한 1919년의 만세운동에 참가했을 게 분명하다. 날조된 ‘옥관자 바우덕이’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화려하지만 본질적으로 통속적인 온갖 미사어구를 동원하여 그를 안성의 상징인물로 추앙한 반면, 동시대를 살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안성 지방의 예능을 주도했”고, 조국과 지역공동체를 위해 감연히 자신을 희생하며 의롭게 떨치고 일어선 이들은 안성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김한영



어디 그뿐인가. 우리의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 지역민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외적의 총칼에 맞서 싸운 1236년 송문주(宋文冑) 장군과 죽주의 백성들, 1361년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기지를 발휘하여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의 예봉을 꺾은 이름 없는 안성의 영웅들, 임진왜란 때 홍계남(洪季男)ㆍ이덕남(李德南) 장군과 들불처럼 일어선 구국의 민병들, 밀려드는 외세의 침탈로 인해 누란의 위기를 맞은 나라를 구하려고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대한제국기 민승천(閔承天) 등 안성의 자랑스러운 의병들, 1919년 불굴의 의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서순옥ㆍ변매화ㆍ최은식과 같은 안성의 위대한 민초들. 이들이 보인 고귀한 희생정신과 영웅적 투쟁, 숭고한 자주정신ㆍ극적(克敵)정신ㆍ호국정신ㆍ독립정신은 교과서에서 단 한 줄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실체도 없는 ‘옥관자 바우덕이’를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조작해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이런 지역공동체의 정신과 혼이 온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걸까?

교과서뿐인가. 안성시는 지난 10년 동안 안성시내 도처에 안성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고 홍보하기 위해 수많은 조각상들과 기념물들을 제작 설치했다. 10여 점에 달하는 이들 조각상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다 바우덕이와 남사당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게다가 바우덕이를 위해 사당도 짓고 심지어 맨땅에 흙무더기를 쌓아올려 묘를 만든 것으로도 부족해 이를 문화재(향토유적 제38호)로까지 지정했다. 심지어 올해는 수천만 원의 돈을 들여 바우덕이의 영정과 만화까지 제작했다.

그럴진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서순옥이 1919년 3월 자신을 내던져 안성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고, 변매화와 그 동료들이 앞장서 “비봉산이 떠나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불렀다는 이 엄연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기릴 조각상은 고사하고 그 어느 공공장소에도 이름 한 자 남아 있지 않다. 송문주 장군은 물론이고, 극적루(克敵樓)의 이름 없는 영웅들, 홍자수ㆍ홍계남ㆍ이덕남 장군, 민승천 장군과 의병들, 최은식 선생을 포함한 양성 원곡의 의로운 열사들을 기리기 위한 영정이나 조각상도 안성 어디를 둘러봐도 단 하나도 없다.

‘바우덕이로’와 ‘남사당로’는 있어도 ‘(송)문주로’나 ‘(홍)계남로’는 안성 어디에도 없다. 숭고한 희생과 영웅적 투쟁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행실도 바르지 않고 업적이랄 것도 없는 그렇고 그런 여사당 한 명을 위해 수백억 원의 세금을 뿌려대며 동상을 세웁네, 초상화를 제작합네, 만화책도 만듭네, 법석을 떨며 우리 아이들에게 위인이라고 가르치는 이 웃지 못할 현실, 이것이 지금 안성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넋 나간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 지점에서 한번쯤 되돌아보고 뼈아프게 성찰하자는 것이다.

▲ <사진 3> 양성원곡 만세운동 재판장면 / 1920년 경성고등법원에서 열린 양성 원곡 만세운동 공판 장면 사진이다. 위의 재판은 양성 원곡의 실력항쟁을 주도한 안성의 독립운동가 최은식(崔殷植, 1899-1960) 등 양성 ・ 원곡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검거된 피의자 127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1920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수록된 사진이다.    © 김한영



김암덕과 동시대를 살았던 두 여인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 ‘옥관자 바우덕이’로 그릇되게 포장된 김암덕과 대비한 글쓴이의 논지는 간명하다. 서순옥과 변매화의 이름을 넣어 도로이름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며(물론 필요하다고 확신하지만), 이들의 이름을 넣어 축제를 하자는 것도 아니며, 이들을 조명하는 데 돈을 투자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체 없는 ‘옥관자 바우덕이’를 만들어내는 데 혼신을 다했던 원인 제공자들 ― 안성시, 안성문화원, 관변 교수들, 상업주의 문필가들이 손톱만큼이라도 문화와 역사를 생각한다면 이제 답해야 한다. 이게 과연 문화와 역사를 새기고 기리는 온당한 태도인가를.


9. 글을 마치며  

기실 하고 싶은 말을 이제 막 시작할 참인데 벌써 이 특집기고를 접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어떻게든 바우덕이의 실체를 추적하는 이 작업만큼은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안성시나 관변 단체, ‘옥관자 바우덕이’와 이해가 걸린 많은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글쓴이가 아니어도 시간이 문제지 누군가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  <사진 4> 바우덕이묘와 영정/  허구를 만들어낸 후 지역의 상징인물로 조작하기 위해 안성시는 ‘옥관자 바우덕이’를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인물”(남사당전수관 홍보게시판)이라는 그럴듯한 수사학을 꾸며냈다. 그러나 맨땅에 무덤 형태의 흙무더기를 쌓아올리고 그것을 문화재로 지정(향토유적 제38호)하는 일이야말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른쪽의 영정사진은 서울에서 발행하는 한 신문의 인터넷판에서 내려받은 것이다. 글쓴이는 안성시 담당자에게 이 이미지를 시민들이 공람하도록 제공해달라고 3차례에 걸쳐 요청을 했으나, 아직 받지 못했다. 외부의 언론에는 공개하면서 지역민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은 행정기관답지 않은, 매우 실망스러운 행태가 아닐 수 없다.      © 김한영



벌거벗은 사실과 맞닥뜨려야 하는 일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 작업은 때로, 까닭모를 슬픔과 허무의 긴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1세기 전 안성에서 살았던 한 여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 주목할 인물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90여 년 전 청룡리를 근거지로 생활한 게 분명해 보이는 김암덕이 바로 그 사람이다. 모두가 화려한 엔터테이너로 각색된 ‘옥관자 바우덕이’로 알고 있는 이 사람의 남루한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이 글쓴이로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건, 살아생전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한 채 통한을 머금고 이승에서 사라졌을 게 분명한 그의 고혼을 불러내 비정하게 난도질하는 악역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앞서 말한 『여사당자탄가』가 그의 노래였을 게 분명하고 매춘부는 그의 다른 얼굴이었겠지만, 그가 매춘을 했건 안 했건, 그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천부의 인권을 부여받은 한 인간이요, 우리와 똑같은 감정과 정념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실체를 조작한 사람들이 나쁜 건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 글쓴이가 나쁜 건지 따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이 자리를 빌려, 글쓴이보다 앞서 이 지역에서 살다간 그의 영전에 후대를 살고 있는 이름 없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조의를 표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김암덕이라는 인물과 숱한 대화를 나눴다. 그가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천형의 굴레를 함께 아파하기도 했다. 그 대화를 나누면서, 글쓴이와 비할 인물은 아니지만, 일본의 소설가 우에 진자부로를 떠올렸다.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그는, 일본이 과거 아시아 국가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고 말했다. 당시의 외신은 그를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 한 사회의 주류들이 가리고 싶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 평했다. 그의 말은 대다수의 양식 있는 일본인들에게 역사의 짐을 일부나마 덜어줬고, 그 고통을 당한 우리에게는 한 줄기 위안이 되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 것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기에 침묵하는 것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그를 통해 배우기도 했다.

▲  <사진 5> 『우리고장 안성』 /  관내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사회탐구활동 시간에 배우는 『우리고장 안성』이라는 제목의 교과서에서 발췌한 바우덕이 관련 부분이다. 190여 쪽에 달하는 이 책 전체에는 조작된 ‘옥관자 바우덕이’가 유일하게 안성의 역사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이 실체불명의 가공인물이 안성의 유일한 위인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 김한영



진실은 양광에 바랜 넝마처럼 남루할 수도 있고, 풍설에 찢겨 너덜거리는 가설건물의 보온덮개처럼 초라할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불편할 수 있다. 또 다른 어떤 이를 격분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바우덕이에게 빼앗긴, 아니 빼앗기도록 오랜 기간 동안 강요받아온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실상을 직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 실패한 목민관과 그 주변 인사들의 그릇된 의욕이 안성 사람들에게 지운 역사의 짐을 덜어내고, 그들의 손에 의해 역사의 감옥에 유폐된 채 실체적 진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안성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 김암덕도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는 길은 있는 그대로의 김암덕을 말하고 실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 길만이 우리 역사의 지평에서 문화의 텃밭을 일구다 스러진 김암덕과 그의 동료들을 가장 명예롭게 하는 길인 동시에, 이러저런 이유로 조작하여 이용해온 그의 고혼 앞에 속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그 길만이 더는 김암덕의 죽은 넋을 불러내 모진 굴레를 씌우지 않고, 글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사암덕주생시민’의 기막힌 현실을 바로잡는 첩경이라 믿기 때문이다.

길어서 지루했을 3편의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글쓴이 후주]

지난 20년간 안성시는 바우덕이가 1848년에 태어나 1870년에 죽은 실존인물이고, 대원군 앞에서 공연을 펼쳐 정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홍보해왔다. 이 3편의 연재 기고문은 안성시의 그런 주장이 안성시민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온 것이기에,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를 묻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글이 인터넷 기사로 나간 직후, 안성시가 반론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사실을 <안성신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글쓴이는 <안성신문>을 통해 안성시에 요청했다. 이 기획특집이 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인데 중간에 논지가 꼬이고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끝낸 후 반론을 제기해달라는 것이었다. 안성시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3편의 글을 모두 매듭지은 지금 글쓴이는 안성시의 반론을 기대하고 있다. 혹시 그렇게 주장한 근거가 있으면 다수 시민들이 공람할 수 있도록 제시해주고, 본 기획특집의 글에서 글쓴이가 제기한 논점에 허점이 있으면 이 또한 가차 없이 지적해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문제에 대해 토론이 필요하다면, 먼저 안성시가 근거를 제시하고 공식적으로 토론회를 제안한다면 글쓴이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음도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둔다. 이제 안성시는 대답해야 한다. 안성시가 주장하고 홍보해온 내용을 사료와 근거에 입각해 입증하지 못하는 한 ‘반론’이 아니라, ‘해명’이나 ‘사과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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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덕이’라는 천한 계집이 정말로 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하사받아 당대 권력으로부터 공식인정을 받았다고 한다면 전통사회가 신주단지처럼 받든 신분과 위계질서를 뿌리부터 뒤흔든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정말로 그랬다면 그 이야기가 당시의 남녀건 노소건, 함경도건 전라도건, 이속(吏屬)이건 상민이건 누구나 할 것도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전국에서 경복궁 중건에 일꾼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통해)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상소문은 물론, 당대 신하들의 개인문집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 유림이나 벼슬아치들의 문적(文籍)이 됐건, 청룡사의 사적(史籍)이 됐건, 사관(史官)들이 쓴 『조선왕조실록』이 됐건, 실질적으로 조정의 공식기록물인 『일성록』(1760-1910)이 됐건, 국가의 중대사를 기록한 『승정원일기』(1623-1910)가 됐건,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지 않았다. 이게 대체 가능한 일일까? 경복궁 중건 당시의 상황을 담고 있는 『고종실록』2권의 기사를 들춰본다. 경복궁 개축이 한창이던 1865년 9월 23일 ‘역군(役軍)들이 추운 날씨에 한데서 일하느라 고생하니 무명 1필씩을 주라’고 명했다는 하찮은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자. 당시 안성군수의 품계는 정4품이었다. 지역의 천한 계집이 대원군을 만나 자신보다 위계가 높은 정3품의 벼슬을 의미하는 상징물을 받고 안성으로 돌아왔는데 1865년 이후에 안성에서 펴낸 읍지 등 공식기록물 어디에도 기록이 되지 않았다. 이런 천지개벽 같은 일이 어떻게 공사(公私) 간의 기록에 남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다, 지금! 그러므로 기록에 남지 않을 가능성은 단 하나다 ― 그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믿는 것은, 비유를 들면, 누군가 63빌딩 옥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졌는데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멀쩡하게 걸어서 집으로 갔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러할진대, 63빌딩에서 떨어졌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내겠다는 둥, 떨어져도 살아남는 기적을 논문을 통해 ‘완벽하게 이론화’(theorizing)하여 입증해보일 테니 좀 기다려 달라는 둥, 63빌딩에서 떨어져서 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왜 청룡리 가서 물어보지 않느냐는 둥의 해괴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음은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 청룡리 마을에 일제강점기 초기에 살았던 김암덕에 관한 기억과 전승은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안성군지』에서 근거 없는 기록을 만들어낸 1990년 이전 시기에 이 마을에서 유래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옥관자 바우덕이’에 대한 전승의 기록을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경복궁-대원군-옥관자-기예가 뛰어난 예인-바우덕이로 연결되는 의미망들이 청룡리 사람들이 생득적으로 얻은 기억의 전승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시점, 다시 말해, 1990년대 이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학습된 기억’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학의 용어로 기시감(旣視感, deja-vu)과 유사한 그런 작용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가령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20년 전 어느 날 무슨 연유에선가 느닷없이 『안성군지』가 그럴듯한 부연설명과 함께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150년 전 안성관아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후 바우덕이 묘와 사당을 재현한 것처럼, 안성시가 나서 마을회관 옆 공터에 관아건물을 복원한다. 이어서, 바우덕이 묘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처럼, 이 건축물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성대한 축제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마을의 지명도도 높아진다. 내가 사료를 통해 그 유래를 직접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안성시에서 관아터 안내문과 입간판을 세우고, 하루가 멀다 하고 문화재 조사원, 연구자, 논문 쓰는 사람, 관광객, 심지어 방송기자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 찍고 조사한다.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다. 거기다가 마을의 나이든 어른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100년 전 박첨지가 살았던 공터 옆의 낡은 한옥을 기억해 낸 후, 아마 그게 관아건물이었나 보다고 한 마디 거든 게 결정적인 구전 근거가 되어 안성관아 설치설은 급기야 기정사실화한다. 이렇게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누군가 찾아와 묻는다. 이쯤 되면 으레 ‘우리 마을에 옛날에 안성관아가 …’ 하고 나오는 것은 인지상정, 정해진 이치 아닐까.

바우덕이가 경복궁에 갔다는 청룡리 마을주민의 증언을 수록한 윤광봉 선생의 1994년 책자도 이 글을 쓰기 전에 이미 다 검토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1990년 이후의 증언은 무의미하기에 적어도 ‘옥관자 바우덕이’가 실존했는가를 논하는 데 어떤 새로운 시사를 줄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안성군지』나 『남사당패연구』 둘 중 하나를 보고 쓴 2000년대에 쏟아져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자, 논문, 보고서, 인터넷 글들도 '옥관자 바우덕이'의 역사성을, 신뢰할만한 자료에 근거해 입증해 보인 것들이 아닌 한, 다 마찬가지라 해야 할 것이다.


*** 다른 건 다 그만 두더라도 이 한 마디는 해야겠다. 늘 절감하는 문제지만 사실 나는 신문에 글을 쓰는 게 참 불편하다. 호흡이 긴 글을 두 편 세 편으로 잘라야 하는 일도 그렇고, 주어진 편집의 판형이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따위의 글을 학술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시각자료와 일정한 학술적 검증이 필요한 호흡이 긴 글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짧으면 늘여야 하고 넘치면 잘라내야 하는 일이 참 고역이다. 대부분은 할 말이 많아 넘치기 일쑤인데,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한 자라도 더 줄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일상화되어 있다.

지난 연재의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린 어떤 이가 말한, 이능화의 책에 실린 노래("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 곱게 잡아 입고 …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네")의 경우도 그렇다. 전문을 모두 수록하면 좋겠지만 한 자라도 더 줄여야 하는 입장에서 일부분만을 발췌해서 인용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원문 전체를 취록하여 원고에 수록하기 위해 이 노래의 전문을 볼 수 있는 사진이미지도 준비했었다. 원고가 넘쳐 부득불 제외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지만.

그리고 앞 구절(“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 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사당질’이 ‘공연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세모시 잔주름 곱게 차려 입고” 갈 까닭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후반부로 이어지는 내용과의 연결성이나 전후관계를 미루어 ‘사당질’을 ‘매춘질’로 새기는 사람도 많고, 나도 그런 견해가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옷을 곱게 차려 입고 가는 것은 매춘의 상대에게 잘 보여 해우채(화대)를 많이 받아내기 위한 몸치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면 청룡리 불당골은 당시의 매음굴이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지역민의 명예와도 연관된 문제다. 사정이 이러할진 데도, 댓글 의견을 통해, 왜 앞 구절은 인용하지 않고 뒷부분만 인용했느냐,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거 아니냐’는 투로 서슴없이 인격적 모욕을 가하는 이런 무례와 불손이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착잡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암덕이 매춘부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그렇다. 당대, 또는 그 시대와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다수의 전문연구자가 일관되게 (여)사당 일반이 매춘을 했다고 보고했다. 물론 김암덕이 매춘을 했는지 안했는지 실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사당 일반이 매춘을 했지만 김암덕만 예외적으로 안했을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할지라도) 설사 있다손 치자. 그러나 학술적인 영역에서 여러 정황과 학술적 보고를 토대로 하고 삼단논법에 따라 ‘김암덕은 여사당이다’ ‘여사당 일반은 상시로 매춘을 했다’ '그러므로 김암덕은 매춘을 했다' 는 일반적 추론을 이끌어낸 것을 누구도 불온시하거나 그릇된 태도라고 말하지 않는다. 불필요하게 말꼬리 잡고 나서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어 부질없는 사족을 붙여둔다.


김한영 (안성참빛교육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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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09/24 [17:05]  최종편집: ⓒ 안성신문
 
^^ 09/09/24 [19:05] 수정 삭제  
  처음에는 부정하시더니만 이제 처음부터 인정했다고 말을 바꾸시고...
청룡리에 가서 인터뷰를 했지만 바우덕이는 묻지도 않았고....
그러면서도 그곳 사람들의 기억은 모두 1990년대 이후에 조작된 것이라는 분명한 단정.....

주유소습격사건을 보는 것 같소이다.
아니 아니
조금은 다르죠....
거기선 한 놈만 팬다 했는데...
여기선 '두 가지만 물고 늘어지면ㅋㅋ....'

게다가 참으로 어설픈 논리의 인물 비교^^

또 하나
시간이 없으니 담에^^
^^ 09/09/24 [19:14] 수정 삭제  
  언제?
누가?
어디서?
바우덕이를 애국적 또는 민족적 인물이라 하더이까?
안성맞침님_거짓말5 09/09/24 [21:16] 수정 삭제  
  오랬동안 3번째 글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에서 김한영님께 한가지 묻습니다.

"안성 관내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의 사회탐구활동 교과서 『우리고장 안성』(사진 참조)에서는 190여 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옥관자 바우덕이’만이 무려 3쪽에 걸쳐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는 말이 정확하게 사실입니까?

교육과학기술부에 신고하려 합니다. 그러면 바우덕이가 허구임이 분명히 밝혀질 것입니다. 또한 관련 공무원의 강력한 처벌을 요청하겠습니다. 허구를 역사의 사실로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KBS와 MBC에도 제보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동북공정이 아니라 안성공정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선 하나 09/09/25 [01:13] 수정 삭제  
  필자의 논리는 참으로 난해합니다.

1990년 훨씬 전에 청룡리에서 태어나 일생을 그곳에서 사신분들이
1990년 훨씬 전부터 들어온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안성시가 완벽하게 조작한 것인가요?
그래서 그분들은 1990년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바우덕이에 대한 이야기를
안성시청 공무원들이 조작한 최면에 걸려 꾸며대고 있는거네요

필자께서는
청룡리에 가봤지만 바우덕이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고 했잖아요

청룡리에 가서 바우덕이 이야기를 묻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
지역사 내지 향토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초보자도 웃을 터인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적어도 그분들의 이야기를 채록하고 면밀히 분석하면서도
결론은 조심스럽게 낼텐데...

어찌 안성 사당패와 바우덕이 이야기의 근원적 출처가 되는
청룡리 사람들의 기억이 어떠한지 들어보지도 않고
그리 단정을 하시는지...

필자의 상상력 참으로 놀랍네요^^
불편한 사람 09/09/25 [02:04] 수정 삭제  
  김한영씨의 글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화려한(?) 문장력과 많은 자료사진을 가지고 안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듯한 김한영씨의 글은 왜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걸까?

이글의 논지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다.
첫글의 논지는 바우덕이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 글은 바우덕이는 경복궁 중건에 참가하지 않았고 1910년대의 그렇고 그런 기예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고
세 번째 글은 그렇고 그런 바우덕이 보다는 안성에 기릴만한 인물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논지는 ‘조작된 바우덕이에 많은 예산을 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 글에 대해서는 글쓴이 스스로가 두 번째 글에서 실존인물이라고 밝혔으니 재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세 번째 글과 관련해서 안성에 기릴만한 인물이 많다는 것에 대해 부정할 사람이 없을테니 넘어갈 수 있다. (바우덕이가 기릴만한 인물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바우덕이에 그렇게 많은 예산을 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책적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기에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문제는 두 번째 글과 세 번째 글에서 거듭 나오는 ‘바우덕이의 생존연대와 옥관자를 받았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바우덕이의 생존연대와 옥관자를 받았는가에 대해서 기존에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른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주장이 틀리다는 확실한 근거(상대방이 완전히 인정하는 근거는 극히 드물다)가 없다면 또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지고 또 다른 연구자나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고 추후 새로운 근거가 나온다면 입장이 바뀔 수도 있다.
과거 역사와 관련해 얼마든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칠 수 있고 그런 경우도 많다. 상반되는 성격의 자료가 동시에 나올 수도 있고, 한 가지 자료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여러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때 학문은 발전하는 것이고 문화도 발전한다.
따라서 이번 글은 ‘기존의 주장에 대해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른 주장을 펼친 것이다’ 정도의 논지였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글쓴이는 ‘단정’하고 있다. 1990년 이후에 나온 자료는 모두 믿을 수 없는 자료이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단정의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새롭게 안성시민들을 학습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1) 홍원의 학예사등이 대표적인 근거중 하나로 내세우는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은 안성시의 지속적인 홍보로 인해 학습된 기억이라고 한다. : 안성시에서 바우덕이에 대해 대중적 관심이 시작된 것은 언제쯤일까? 바우덕이 축제가 시작 될 무렵인 2000년쯤으로 보면 무리가 없지 않을까? 김한영씨 논리대로라면 그전부터 그러니까 1990년 무렵부터 안성시와 안성문화원은 청룡리 주민들을 학습시킨 꼴이 되고 청룡리 주민들은 그 학습결과대로 증언한 것이 된다. 그냥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여기서 구술자료의 중요성이나 그 방법론, 역사학에 있어 차지하는 위치 등에 대해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에 나온 ‘구술자료를 역사자료로서 수집한다는 것은 문헌으로 남겨지지 못한 다양한 경험과 기억, 그것에 대한 해석을 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라는 글귀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현장에 나가 주민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이 근거라는 것인데 이게 근거인가?

2) 글쓴이의 표현대로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1990년 이후에 나온 책자와 논문, 보고서는 『안성군지』나 『남사당패연구』 둘 중 하나를 보고 쓴 것이기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한다 : 그 많은 연구자와 저자들이 모두 관변 교수들이고 상업주의 문필가들이란 말인가? 그 글들에 대해 다 알지 못하기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는 관련 학문분야의 전문가도 있을 것이고 교수도 있을 것이고 학위논문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그런 글들을 읽어보기라도 했나? 아니면 이 역시 그럴 것이라는 김한영씨 자신의 상상인가?

묻고 싶다.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과 관련 전문가의 저작들을 그렇게 매도할 근거와 자격이 글쓴이에게 있는가?

여기서 내 불편함의 이유와 다른 사람들이 글쓴이의 저서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된다.
앞에서 드러난 이 기획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글쓴이의 자질과 전문성에 대한 의심이 그것이다. 자질과 전문성에 대해 의심되기에 글쓴이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고 자격을 지적하게 된다.
자질과 전문성이 의심되는 이유는 앞에서 지적한 문제외에 이 글에서는 명백한 기초적 사실에 대한 오류가 보이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글쓴이의 저서 를 보면 보다 분명하게 자질과 전문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는 일반인이 볼 때는 화려한 편집과 방대한 분량을 느끼게 하는 두께만으로도 잘 만들었다는 느낌을 가질법한 책이다.
그러나 조금만 안목이 있는 사람이 조금만 찬찬히 책을 읽어본다면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한 비판의 가혹함은 그만두고, 이 글에 대한 댓글에서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수정정도로는 곤란하고 책을 다시 만들어야 할 만큼의 오류가 발견된다.
물론 글을 쓰다 보면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하기에 학문하는 사람들은 항상 겸손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오류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자세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다른사람의 오류에 대해 비판할 때는 인격적으로 모욕으로 느낄만큼 엄격한 잣대로 지적하면서 스스로의 오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다른 자리에서 밝혔다’며 두루뭉실 넘어가고 있다. 그러하기에 자질과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을 학습된 것이라고 단정하고 수많은 전문가의 견해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며, 안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였다.
어떤 글에 대해 이해할 때는 글 자체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함께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안성신문에도 한가지 이야기하고 싶다.
이글은 단순한 기고글이 아니라 첫글에서 이야기했듯이 글쓴이와 안성신문이 ‘함께’ 마련한 글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안성신문에 대해 시정의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우덕이와 관련해 그렇게 많은 예산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 기획특집기사에 대해서는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 연재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연재글의 경우 안성신문에서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글을 사전에 읽어보았다면 과연 연재를 허락해야 했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역사나 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글이기에 이해할 수도 있지만 두 번째 글에 대한 인터넷 댓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면 세 번째 글의 방향은 조금 달라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면으로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의 쓴 소리가 장기적으로 안성신문에 약이 된다는 마음이다.
김한영 09/09/25 [09:58] 수정 삭제  
  '불편한 사람'님.
참 오랫만에 접하는, 의견 다운 댓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안성맞침님_거짓말5' 님.
글쓴 사람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 문제는 안성사람들이 안성 안에서 풀어내야 할 문제입니다. 제발, 이 문제가 안성 밖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자중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늘 그런식 09/09/25 [11:18] 수정 삭제  
  첫번째 기사에서부터 쏟아지는 질문들....
글쓴이께서는 자진의 주장만 하시면서...
글쓴이의 주장에 동조하는 말에는 감사를 드리고....
(아~ 이번에는 반론에도 답변대신 감사를 했군요^^)
곤란한 질문은 무시와 침묵으로 일관하시고...

'기획특집'이라는 코너...
간단한 내용에 대해 화려한 단어와 수식을 동원하여 엉성한 논리를 감추며
사정없이 공격하면서도
댓글을 통해서는
'이 문제가 안성 밖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호소'하는....

이건 하이 개그지요^^
안성맞침님_거짓말5 09/09/25 [17:25] 수정 삭제  
  김한영님

사람들이 반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제가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양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끈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의도적으로 잘못을 가르친다는 것이 화가 납니다.

분명히 거짓인데도 불구하고, 댓글을 쓰는 분들을 보면 글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호도하고, 꼬투리 잡고 위협하는 저질스러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우덕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잠시 참아두겠습니다. 안성시에게 말씀드립니다. 계속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면 안성을 넘어서는 문제로 확대시키겠습니다. 제가 볼 때,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사실은 교과부, 메이져 신문사/방송사에서 충분히 관심을 갖을 문제입니다.

안성의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서 왜곡된 것을 선전하는 것은 2차적인 문제입니다.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지는 마십시오.
짜고치는 고스톱 09/09/25 [18:08] 수정 삭제  
  누가 호도하고, 꼬투리잡고, 위협을 하고 있나요? 생각에 따라서는 '호도'나 '꼬투리잡는' 것으로 볼수도 있겠지요. 특히 눈감고 귀닫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크더라고요.
그런데
김한영 선생님을 위협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말씀인가요?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위협을 한다는 거지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오히려 진실을 호도하고 있지 않나요?
빠진게 있오! 09/09/26 [08:50] 수정 삭제  
  이동희와 그 똘마니들 들으시요.
빠진게 있오.
바우덕이가 안성천에서 나뭇잎타고 평택까지 갔다는 사실이 빠졌소.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을 빠트리고 뭐들 하시요.
꼭~좀 챙겨서 추가해주시요.
평택 장날 때마다 바우덕이가 나뭇입 타고 안성천에서 평택까지 오갔다는 사실을...

이제 바우덕이는 안성 고장의 인물이 아닌 세계역사책에도 나올 세계적인 바우덕이가 된 것이요.
안성사는사람 09/09/26 [15:17] 수정 삭제  
  세편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쓴이가 주장한 것에 대해 안성시에서 근거를 제시해주세요.
저도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바우덕이에 대해 나온것을 보았기때문이죠.
배우는 학생들이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되지 않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더 많은 어린학생들이 알기전에...


그리고 댓글 쓰신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의견이나 주장이 다를수 있죠. 자기의 생각만 전달하면 되는것 아닌가요?
헐뜯거나 비아냥거리지맙시다
댓글 다는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지 모르지만 보기 참 흉합니다/





학교샌님 09/09/26 [18:56] 수정 삭제  
 
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입니다.

몇년전에 [축제의 사회성]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글을 다 읽었습니다. 댓글들도 봤고요.

저도 평소 바우덕이에 대해 의문나는 점이 많았습니다. 여기저기 관련자료들을 보니 다 연대가 다르더라고요. 김한영님의 글을 읽고 보니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는 느낌입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늘 고민인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진짜로 가르쳐야 할 것들은 안 가르치고...

역사학이 제 전공분야는 아니지만 이와 연관된 어떤 역사적 사실을 구명하는 데 구술증언도 나름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문헌이나 기록, 실물자료, 물증 등이 아닐까요? 구슬 중언은 어떤 사실을 뒷받침하는 참고자료로 생각해야지 아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신뢰성이 없는 자료라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 문제는 구비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안성시가 말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 아닌가요?

위 글에서 제기한 논의의 핵심은 안성시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역사적 사실이라고 홍보했기 때문에 빚어진 문제 아닐까요?

바우덕이가 경복궁에 가서 옥관자를 하사받았다는 청용리 사람들의 구술증언이 1990년 이전에 있었음을 입증할 기록이 없는 게 분명하다면 글쓴이의 논리가 더 설득력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2편에서 말한 [남사당패연구] 라는 책을 저도 며칠전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옛날에도 본 적이 있긴한데 그땐 건성으로 봤고요 이번에는 좀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바우덕이가 대원군에게 옥관자를 받았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더라고요. 바우덕이가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192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요.

이 책의 저자는 당시 여러차례 청용리를 방문해서 남사당 단원들과 주민들의 증언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김한영님이 말한 것처럼 만일 당시 청용리 주민들이 그런 증언을 했다면 이 책에서 그러한 사실을 빠뜨릴 리 없겠지요. 당시 청용리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언이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을 쓰면서 적지 않은 게 아닐까요? 책에 안성 청용 바우덕이~로 시작하는 노래도 소개돼 있던데 경복궁에서 옥관자를 받았다는 내용을 일부러 누락시켰다고 생각할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남사당패연구]가 나온 1970년대 중반까지는 청용리에 그런 증언이 없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안성시가 말한 게 사실이면 글쓴이가 말한 것처럼 과거의 여러 기록물에 누락되었을 리 없겠지요. 특히 옛날에는 고을마다 기록물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안성에서 나온 기록물은 더욱 그렇겠지요.

위에 댓글 다신 분들 구술 증언 말씀들 하시던데 이게 핵심 아닐까요?

저도 그렇지만 많은 안성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한영님도 이런 문제제기의 글을 쓸 때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안성에 바우덕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은데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테고요. 저도 좀 더 자료를 찾아보고 필요하면 다시 댓글을 올리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논문을 써봐서 드리는 말입니다만, 글 참 잘 쓰시네요^^

그리고 안성신문에도 부탁합니다. 안성시가 입장을 내놓으면 신문에서 소개해 주시고요 토론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저도 시간이 맞으면 참석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안성맞침님_거짓말 09/09/27 [00:07] 수정 삭제  
  2편에 안성맞침 홍*의라는 분의 댓글을 보세요.

“저는 경복궁에 바우덕이패가 출전하여 옥관자를 받았다는 이론을 완벽하게 추론하였습니다. ----글쓴님이 바우덕이가 1920년대 사람이고, 경복궁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료와 근거에 기초해’ 논술하여, 엉터리로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여야 합니다.”

정말 수준 이하입니다. 논문을 추론해서 증명했답니다. 정말 내삽과 외삽의 개념도 없어요. 또 경복궁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랍니다. 차 웃겨요. 역사에 없던 것을 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증명해야지. 어떻게 없던 것을 없는 것으로 증명하라는 말인지?
거짓말 들어라 09/09/27 [23:03] 수정 삭제  
  거짓말아 잘들어
형아가 친절히 설명해 줄께
너같은 머저리에게는 매가 약이지만, 게임 값 물어주기 싫어 예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김씨라는 사람이 너한테 와서 너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희 친할아버지가 아니라고 물려받은 재산 다 내 놓으래
처음엔 그냥 농담인가 하고 웃었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야 이놈이 돈을 노리고 그러는 거야
네가 재산을 물려준 할아버지 손자인 증거가 없다고
호적에 1년 잘못 등재된 걸로 말이지
그래서 내가 친손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라고, 무슨 이유로 그러느냐고 했지
그러자 그놈은 적반하장 격으로 네가 친손자라는 증거를 대라고
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친손자라는 증거를 못 대면 사기 친 거라고 말이야
아주 어이없는 일이지
주위 모든 사람들이 손자라고 인정하고, 제사도 지내고, 재산도 지켜왔는데 말이지
그런데 김씨가 그런 주장을 하자, 주위에 재산을 탐내는 똥파리들은 모두 붙어서
“맞아, 네가 친손자라는 증거를 대. 그렇지 않으면 넌 가짜니까 우리한테 재산을 다 내놔”
점점 이런 현실이 되고 있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
그럼 너 같으면 뭐라고 대답할래?
친손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어보지 않겠니?

너같은 머저리는 아무 근거 없는 주장가지고 떠드는 이야기 가지고
할아버지 묘 파서 DNA 검사해서 결백을 주장하냐?
이 덜떨어진 인간아
그럼 얼른 너네 할아버지 검사해오면 너 주장이 맞다고 인정해 준다.
그런식이니까 너는 백수인거야. 만날 면접에 떨어지지
멍청하니까.

솔직히 말도안되는 논리를 주장하는거보면
거짓말은 김한영이 틀림없으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네
과학기술부, KBS, 놀고자빠졌네
얼른 신고해라
글적는시간 09/09/28 [01:09] 수정 삭제  
  우와 김한영 정말 우낀다...

'안성맞침님_거짓말5' 님.
글쓴 사람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 문제는 안성사람들이 안성 안에서 풀어내야 할 문제입니다. 제발, 이 문제가 안성 밖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자중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비화되지 않도록 자중해야 하는 이유...
1. 우선 비화될 꺼리도 안된다. 깜도 안되는 걸로 비화까지 이야기 하지 말지어라... 언어도단이다.

2. 왜 안성에서 해결해야 하는거야? 더 전문적인 주장에 맞대응할 자신이 없는건가? 그나마 안성에서는 나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억지로 인맥을 통해서 시간끌기로 대충 넘어 갈 수 있었는데.. 한방에 무릎꿇게 만드는 핵심적 문제지적에는 자신이 없다는 건가...

3. 안성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김한영씨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은 쉽게 말해 일ㄴ 것이라 생각. 초딩이 어설프게 배운 중학수학을 응용한다며 시작부터 틀린 문제를 내어 풀어 봐야 한다며 이건 중학생으로서 의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오...

위에 거짓말 듣거라 해서 적어 신분 글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거짓말.. 제발 머리에서 생각(있는지 몰라도)나는대로 글 쫌 적지 말지어라... 부탁이니라..
기본 09/09/28 [08:00] 수정 삭제  
  바우덕이에 대한 1차 사료는 심우성의 가 아니라 '청룡리의 구전'입니다. 1990년에 이미 50~60대, 지금은 70~80대의 노인분들의 기억을 그분들과 인터뷰 한번 해보지도 않고 조작된 것이라 단정해버리면 연구의 방향이 한 참 잘못된 것 아니오? 참으로 웃기는 논리요! 이는 그분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거니와 학문연구의 기본중에 기본을 전혀 모르는 한심한 자기방어적 논리가 됩니다.
김한영씨는 지금이라도 청룡리에 가보시오!
강패 09/09/28 [10:09] 수정 삭제  
  지랄들 하고 있네... 바우덕이를 창녀로 만들어라...니기미...
학교샌님? 09/09/28 [13:50] 수정 삭제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되 감정상하지 않도록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쓰는겁니다. 논거를 바탕으로 추론하되 한 두 가지의 사실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전체를 호도하는 엉터리 논리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드라이하고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화려하고 선동적인 단어를 동원하는 문장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피해야 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김한영씨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우덕이가 활동했던 연대와 옥관자를 받았다는 주장에 무리가 있으니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김한영씨는
"바우덕이가 활동했던 시가가 잘못되고 옥관자를 받은 것이 순 날조이며, 그러므로 바우덕이는 조작된 인물이다"라는 것으로 시작하여, "매춘부가 안성을 대표하다니" 등 매우 공격적이고 선동적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우덕이에 대한 구전의 산실인 청룡리 사람들의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바우덕이를 정리하고 단정하는 것이 바른 연구와 글쓰기가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주장이 학문적, 객관적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좀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될까요? 학교 샌님도 논문을 써보셨다니 글쓰기를 잘 아시리라 봅니다.
학교샌님!
김한영 선생님의 역작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지요. 굉장히 두꺼운 책이지요. 그런데 오류를 발견하지 않고는 몇쪽을 넘기기 힘들겁니다. 그 책은 일종의 면지(面誌)라고 할 수 있는데, 제보기엔 자비로 출간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청이나 문화원 혹은 보개면의 보조를 받았겠지요. 그것도 시민 세금으로 충당되었을텐데, 시민들의 혈세를 받아 그렇게 책을 써도 되는지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바꾸자 09/09/28 [15:44] 수정 삭제  
  지금의 시위원 시장 다 바꾸면 끝날 일들을...
바꾸자!!!
쭉읽은이 09/09/29 [01:01] 수정 삭제  
  댓글까지 읽는데 1시간이상 걸렸네요.
안성에 정착한지 이제 3년인 안성시민입니다.
특집 연재
재밌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마지막 부분인 다른 역사적 인물과의 비교는 좀 오바하셨네요.
구전의 역사 또는 기층민의 역사가 담긴 책들은 논지에 부합되는 내용만 기술하는게 일반적이지요. 구술되는 또는 알게 된 모든 내용을 담아내기엔 한권의 책으로도 부족하겠지요. 백과사전이 아닌 이상. 글쓴님이 이 특집연재에 다 서술하지 못하였듯이.
그 필자가 알고 있다고 해도 왜 제시하지 않았는지는 글쓴이의 마음일테구요. 뭐~ 논리가 부족할 수 도 있겠지요.
궁금한 문제들, 의혹이 있는 문제들은 제기할 때 많이 신중하셔야 했는데...
글쓴님은 글을 많이 쓰셨던 분 같은데 좀 성급하신게 아닌지, 그리고 논리가 많이 약해보이십니다. 댓글은 제외하고 주욱 드래그해서 1편부터 3편까지 다시 읽었습니다. 댓글때문에 글쓴님의 논지가 헛갈려서. 누군가 제 짧은 단상에 '비논리적'이란 말을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 글쏨씨야 제가 아니깐. 각설하고,
구비전승이 역사적 사실로 학계에 인정받기까지 오래걸린다고 합니다. 또 헌법재판소 같은 곳에서 망치로 땅땅 치면서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든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아야겠죠.
일제 강점기때처럼 계몽하는 시대도 아니고 안성시민들이 꼭 계몽당항 것 같아서 많이 씁씁합니다. 그리고 바우덕이가 축제가 취소되고 선거를 앞둔 시점에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가? 의구심이 편향적으로 드는건 어쩔 수 없네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저도 궁금합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신 분들 그냥 빠지지 말고 다들 계속 관심을 가져야하실 겁니다. 저도 이렇게 댓글을 단 이상 그냥 불구경하진 않을랍니다. 여기에 대두된 자료들부터 하나하나 찾아봐야겠네요.
학예사님께 찾아가는게 빠르겠네요. 그분 참 바쁘시겠군요.
...

참 예의를 차리면서 쓰기 어렵네요. 워낙들 대단하셔서~
답답한사람 09/09/29 [12:33] 수정 삭제  
  과거에 있었던 일이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 할만한 사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우덕이에 대해서 조사한 심우성의 책에서 보면 대원군에게 옥관자를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취록되어있지않다고 합니다.그때 당시에 구술 증언한 사람이 일부러 전하지 않았을까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않잖아요. 또 그 책에서 1920년경 병사했다고하면 생몰연대도 맞지않잖아요 그러면 지금까지 아려진 바우덕이는 실존일물이 아닌게 분명하네요. 오래전에 구술을 취록한사람이없었다면 모르지만 그러한사실이최근에알려졌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답답한사람 09/09/29 [13:33] 수정 삭제  
  어 글이 짤렸네. 애써서 쓴 글이었는데

그러면 이어서) ... 이해가 가지 않네요. 누가 분명하게 알려줘야하지 않을까요 모두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시청에서도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쓴이의 글만 가지고 이렇쿵 저렇쿵 말들만 많지 누구하나 속시원하게 사실인지 아닌지 말해 주는 사람이 없네요. 그래서 답답한 시민 1인...
학교샌님 09/09/29 [14:45] 수정 삭제  
  관심이 있어도 댓글 한번 쓰기가 쉬운 일이 아니네요. 2편도 그렇지만 본글보다 댓글이 더 재밌네요. 댓글 읽다보면 본문에서 읽은 내용이 가물가물해진다는,, ^^

[쭉읽은이님]이 말한 것처럼 이런 글을 쓰는 글쓴이 입장에서는 일정한 의도는 있겠지요. 글쓴이님은 없다고 하시지만.. 축제가 취소되고 선거도 있고 바우덕이 드라마 문제도 시끌벅적하고... 세상에 의도 없는 글이 어디 있을려고요.

그런데 선거를 의식한 거라면 제가 보기에는 그 타이밍과 의도가 좀 어리숙해 보여요. 선거를 목표로 했으면 선거가 임박해서 두어달 전에 하는 게 더 요과적이지 않을까요? 이런 민감한 주제는 시점이 언제든 오해를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선거가 끝난 후에 제기하면 또 왜 이제서야 제기하는 의도가 뭐냐고 할 사람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위에 제 글에 답글을 쓰신 분 그 위에 있는 [기본]이라는 닉네임으로 글쓴 분ㄷ과 동일인 아니세요? 시청 직원분 아니신지??? 어떻게 구전을 1차사료라고 할수 있는지 놀랄 놀자네요. 학문적 연구의 [기본]을 그 근간부터 뒤엎을 형명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네요. 그 위에 있는 여러 댓글들 비꼬는 어투나 한결같이 구전 타령하는 글들도 혹시 님이 쓰신 같은 글 아닌가요?

자료를 좀 더 찾아보려고 해도 시간이 허락칠 않네요. 그래서 뭔가 글을 좀 써보려해도 막연히 생각만 맴돌뿐 괜히 엉뚱한 말이 될 것 같아서,,,
자료 조사를 좀 더 해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에 쓰기로 하고 그럼 저는 이만 휘리릭~
안성맛침 09/09/29 [16:24] 수정 삭제  
  지금까지 세편 기사의 요지는 안성시에서는 1860년대 인물이라고 하나 아무리 자료조사를 해봐도 1920년대 인물이라는 것과, 바우덕이가 유명하였다고는 하나 사료에 나와 있지를 않아 믿을 수 없다는 것, 또 옥관자를 받았다고 하나 안성군수보다 높은 품계인 정 3품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예능인에게 주었을 리 없고 만약 주었다면 사료에 나와 있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 글의 요점인 것 같습니다.
글을 읽어보니 글쓴이의 마음을 이해하겠습니다. 저도 2005년도 안성문화원에서 강의를 할때까지는 현재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의문 그대로를 품고 있었습니다. 1호 기사에서도 “안성시의 한 공무원이 바우덕이의 실체와 행적에 대해 의문을 쓴 적도 있는데, 왜 여기서는 입장을 바꾼 건지에 대한 해명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하여 글쓴이는 제가 이미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번 댓글에서도 밝혔듯이 그 이후 많은 자료수집과 현장 조사를 통하여 바우덕이가 경복궁 중건 때 옥관자를 받은 인물이며 유명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추론하였습니다.(댓글에 거짓말님이 추론을 한다고 비웃었는데 이는 인문과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문과학은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추론을 하는 것이 인문과학입니다.) 글쓴님은 본인이 밝혔듯이 최근에 관심을 갖고 찾아보았다고 하였고, 저는 훨씬 이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누가 연구를 더 많이 했고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논문 집필중이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갖고 증거를 대라고 하니 우선 간략하게 소개 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가 아는 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본인이 공부를 하지 않아 모르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예로 글쓴님이 ‘안성판 방각본, 97년만의 귀향’이라는 기사(안성신문 7. 29일 인터넷 기사)에서 본인이 안성판 방각본을 안성에서 처음으로 찾았다고, 남몰래 흥분하였다고 하셨는데, 이미 안성맞춤박물관에서는 안성판 방각본을 2004년부터 몇 점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안성맞춤박물관 소장품도록 및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공개하고 있습니다. 안성시립도서관 또는 전국도서관 및 안성맞춤박물관에 오시면 언제든지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공개되어 있는 내용을 본인이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이번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제가 쓴 2005년 안성문화원 강의교재 〈안성남사당에 대한 소고〉란 글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경복궁 중건당시 교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실제 관직에 임명된 것은 아닙니다(조선후기에 국가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정부에서는 백성들로부터 돈이나 쌀 등을 받고서 사령장을 발급하였는데 이를 납속첩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첩을 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채 발급한 사령장이 있다.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써 넣는 식으로 남발을 하였는데 이를 공명첩이라 한다. 공명첩을 받은 경우 그 첩에 기재된 관직에 실제로 나아가 업무를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옥관자를 받았다고 하여 진짜 관직에 임명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내용은 그 강의교재에 모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옥관자를 받았다고 군수보다 높은 품계인데도 왜 사료에 나와 있지 않느냐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발상입니다.
삼천리 제3호(1929. 11.13)에 보면 창을 하는 이동백옹과의 대담에 이동백옹이 고종때 궁궐안 장악원에 인연을 맺고 경복궁과 덕수궁을 드나들며 옥관자를 달고 官服出仕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또 별건곤 제3호(1927. 1. 1)에 보면 경복궁 중건때 대원군이 歌妓舞童을 모집하여 선소리를 시키고, 그 가기무동을 위안하기 위하여 관작까지 줘서 궁중 藝妓까지 주먹 같은 옥관자를 복색 좋은 수탉 머리 모양으로 딱딱 붙이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된 것도 이때부터라고 하여, 연희자에게 옥관자를 수여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뛰어난 연희자에게는 옥관자 자주 내려줬던 것으로 보이며, 바우덕이가 옥관자를 유일하게 받은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안성맛침 09/09/29 [16:24] 수정 삭제  
  청룡리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옥관자를 받은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글쓴이 같은 연구자들도 옥관자의 수여 자체를 부정하는데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 까요? 사실 예능인에게 옥관자를 수여했다는 자료를 처음으로 찾은 것이 아마 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누구의 논문에도 나왔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마 글쓴이가 자신 있게 안성군수보다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없다고 쓴 이유일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논문 주제로 삼았고,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한 이유 입니다. 만약 이 자료를 누군가 연구자가 보고 저보다 빨리 논문을 쓴다면 저는 ‘닭쫓던 개 지붕 처다 보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에 원전 출처의 공개를 망설였던 것입니다.
청룡리 마을 주민들이 학계에서도 아직 발표되지 않은 경복궁 중건 때 옥관자를 수여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글쓴이 논리대로라면 안성시와 안성문화원은 상당히 수준이 높은 분들이군요. 학계에서도 모르던 일들을 지속적으로 조작해 왔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제가 추론한 이론 중의 하나입니다. 학계에서도 모르던 사실을 청룡리 주민들은 구전을 통해 알고 있었고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속학이나, 국문학에서 구전을 전공하고 연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글쓴이가 글에서 “김암덕과 그의 패거리들이 ‘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곱게 잡아 입고 안성 청룡’에서 ‘사당질’하고 있는 동안”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 말은 결국 이능화 선생이 본 1870년대에 본 이 노래에 나오는 유명한 사당이 바로 바우덕이를 말하는 건지요? 1920년대 인물이라고 계속 주장하다가 왜 1870년대에 나오는 노래 주인공을 바우덕이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사당패에서 아무도 바우덕이를 모른다고 하였는데, 김용례(현 평택농악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선생에 의하면 자신도 어렸을 적 남운용 선생에게 바우덕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우덕이가 유명하였다는 증거가 없다, 꼭두쇠라는 증거가 없다 따위의 유치한 질문은 답하지 않겠습니다. 심우성 선생이 쓴 남사당연구를 정독해 보십시오. 참고로 바우덕이가 5살 때 남사당패에 들어와서 15살 때 꼭두쇠가 되고, 23살 때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심우성 선생의 증언입니다.
글쓴님은 1990년 이후에 안성에서 조작하였다고 말했는데 사실 바우덕이에 관한 단편적인 관심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 주목한 것은 KBS입니다. 1981년 TV문학관 26회에서 바우덕이에 대한 내용을 방영하여 안성에서 바우덕이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켰습니다. 이후 안성의 맥(1981), 향토교육자료집(1984)에 바우덕이가 경복궁 공연에 간 내용을 담고 있어 글쓴이가 주장하는 1990년 안성군지 이후 시청과 문화원에서 조작하였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작의 선봉은 KBS란 말인데, 댓글의 거짓말님 말씀하신 것처럼 KBS를 상대로 소송이나 고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글쓴님은 학생들이 배우는 책에 역사적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는 독해력이 딸리는 생각입니다. 신문에 나온 스캔 내용을 잘 읽어 보십시오. ‘넋을 읽고 구경하였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합니다’라는 것은 傳言을 말하는 것으로 직접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 글에 관심 있는 독자는 모두 잘 알다시피 바우덕이는 청룡리의 구전에 의한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교과서는 그것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입니다.
이 외에도 너무 많은 증명할 것이 많지만 댓글이라는 한계상 그만 접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논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글에 대하여 반박이나 의문이 있으시면 언제든 박물관으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본 09/09/29 [17:47] 수정 삭제  
  '학교샌님'
위의 댓글을 보고 판단하건데, 저는 바우덕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안성맛침님의 10분의 1 정도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기본적인 내용 정도만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번 논란에 짧게 댓글을 달았던 이유는 김한영씨의 논증에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기사의 댓글에서 김한영씨는 청룡리에 대한 조사가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그 조사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번 기사에서 1990년대 이후 청룡리 사람들의 이야기는 외부의 영향으로 조작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이런 김한영씨의 주장이 학교샌님은 이해가 가십니까?
앞의 댓글에도 많이 있듯이, 이번 기사와 같은 글을 쓰면서 청룡리에서 구전된 이야기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나 민속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보자도 발견할 수 있는 큰 문제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에서 여러 댓글이 올라온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사료란 ‘역사연구에 필요한 유물이나 기록, 건축 등’을 의미하지요. 아직까지도 사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동안 구전은 민속학 등에서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전통적으로 역사학에서는 등한시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문화인류학, 생활사, 미시사, 지역사 등에서 구술사를 중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별도의 예산을 편성하여 근현대 구술자료 수집하는 사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지역사 내지 향토사에서 구술사의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고 있습니다. 구전도 중요한 사료 중 하나가 됩니다. 다른 사료들처럼 검증을 거쳐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만.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얼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교샌님도 최근 역사학의 동향이나 방법론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저 안성시청 공무원 아닙니다^^
관심가 09/09/29 [23:25] 수정 삭제  
  김한영 안성맞침에게 KO패
안성맞침이 하는 말에 논리적 반박 한번도 못함
그런데 이글을 보고 안성시청 홈피를 보면 민주당의 홍석*이란 사람이 김한영이를 사주한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김한*, 홍석*, 안성신문 끼리끼리 노는구먼
계속 말도 안되는 소리 지껄여 보렴
거짓말 이란 가명 앞세워서
관심가 09/09/29 [23:42] 수정 삭제  
  내일 시청 홈페이지에 올려야지~이
보개면지 잘못된 내용 있으면 폐기하고 보조금 전액 회수하라고~오
잘됐으면 괜찮을 것이고 잘못됐으면 돈 토해내면 될것이고~오
기자님 말씀대로 혈세이니까~아
아이쿠 재미나네 이거
돈토해내고 고발당하고

나그네 09/09/30 [01:07] 수정 삭제  
  댓글을 너무 많이 읽다보니 머리가 아프네요~~
글이라는건 때로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거죠---
글잘쓰는 분들은 지나가는 사람이 글로 맞아 죽어두 글로 미안하다는
글한마디면 간단하게 해결되는거죠---
우선은 김한영씨에게 한마디 하렴니다...
글을 다읽고보니 김한영씨는 그시대에 바우덕이를
정확히 알고 이야기를 하는겁니까--
아무리 구전이라고 해도 본것처럼 정확하게 바우덕이를
실존인물이 아니고 매춘부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쓸수있는겁니까...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때로는 잘못된
부분도 없지않습니다..
하지만 좀더 지역 역사를 자세히 알고 글을 써주셨으면합니다...
자기에 소견을 역사에 비춘다는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봄니다...
전체적인 글을 읽다보면 그럴싸하게 볼수있지만 남사당에 몸담고있는
어르신들의 역사적인 글은 하나도 안보입니다....
전설에 고향을 보더라도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허구로 꾸며서
나오지 않습니다...
현재 남사당에 몸담고 계시는 어르신들도 그위분들에게
듣고 또 배우고 해서 공연을 하셨기에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봄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어렵게 썼습니다..^^
지역 문화를 자기에 소견만 가지고 글을 쓴다면은 그건 글을 쓸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봄니다....


학교샌님 09/09/30 [08:49] 수정 삭제  
  생각이 정리되면 글을 올린다는 게 궁금해서 자꾸 기웃거리게 되네요 쩝!

그사이 많은 글들이 올라왔네요. 댓글답변을 접하니 또 둥금한 게 생겨서... [안성밎침]님과 [기본]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기본]님 친절하게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본]님이 말한 구전이 1차사료라는 말은 이해가 안 되네요. 좀 오버하신 거아닌가?
심우성의 [남사당패연구]를 다시 보니 1974년 초판이 나온 책이고 1990,2000년에 재판과 개정판이 나왔네요. 그민큼 이 분야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요. 제가 위에서 이 책을 전에도 본적이 있다고 했잖아요? 실은 오래전 대학에 다닐 때 학점이 부족해 [구비문학의 사회성]인가 하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레포트를 쓰느라 봤던 책이에요. 챙피하지만 그때 워낙 건성으로 봤기 때문에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김한영 님의 글을 읽다가 이 책에 대한 얘기가 나오길래 다시 관심을 가지고 빌려봤어요. 지금도 제 책상 위에 있네요^^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말하는 구술에 대한 중요성의 강조는 그동안 학문연구 일반에서 소홀히 다뤄졌던 구전을 새롭게 주목하자는 취지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책을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레포트를 내준 교수님이 이 책이 남사당패를 연구하는데 가장 기본이고 스탠다드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에요. 50년 전 현장을 여러차례 방문(당연히 마을주민들의 구술도 자세히 조사하고 청취했겠지요^^) 하여 사람들을 만나 조사하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인데 어떻게 이 책보다 현재의 구술증언이 1차적 사료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한거죠. 위의 글에서 제가 경복궁 공연 내용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점을 [기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핵심적 문헌이 있는데도 이 책보다 지금의 청용리 사람들의 구전이 더중요한 1차사료라 하시니 놀랄 놀자라고 한거예요. 시대에 따라 연구주체에 따라 시각과 강조점은 다를 수 있고 또 오랜 ㅜ학문의 역사를 되돌아봐도 그렇죠. 하지만 역사학이건 제가 공부한 사회학이건 학문연구의 보편성이라는 게 있는데... [기본]님이 좀 오버하신 거 같네요. 인정할 건 과감히 인정하는 센스^^ 아시죠?
그리고 [기본]님의 글이 아주 전문적인데요 안성시청 공무원이 아니라시니 뭐 하시는 분인지.. 이 분야를 연구하시는 분인가요? 그런데 위에 댓글 중 다른 글도 쓰신 분 아니가요 하고 물었는데 왜 대답을 안하시는 건가요? [학교샌님?]이라는 이름으로 제 글에 대한 답변글은 [기본]님이 쓰신거 같고... [우선하나]나 [불편한사람]의 글도 [기본]님이 쓴거 아닌가요? 청용리 구전을 강조하고 [보개면의 사와문화] 말씀하시는게 같은 사람이 쓴 글 같네요. 댓글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묻고 답하고 하는데 닉네임이 바뀌면 헷갈리잖아요^^
바우덕이 문제를 제기한 3편의 글을 쓴 김한영 선생님도 여러 반론의 글들이 올라오는데 답변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 침묵을 지키고만 계시는지 알 수가 없네요. 반론같지가 않으신가요? 아니면 안성시의 공식적인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그래도 답변을 헤주시면 좋을 듯한데...그래야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시간을 내서 저도 자료공부를 더 해서 다시 와서 제 생각을 글로 올릴께요
[안성맞침]님에게도 묻고 싶은게 있는데 시간상 담에~
양은냄비 09/09/30 [11:58] 수정 삭제  
  이제 안성시의 공식적인 답변인지 변명인지 들어볼 차례 아닌가?

웬? 양은냄비 끓어대는 소리들이 이렇게 많은지?

추석한가위 밝고 둥근 보름달 보며 놀라 짖어대는 개들마냥 잡소리들은 잠시들 접어두고 기다리면 될것을ㅉㅉㅉ

바우덕이가 자기 조상님들 보다 더 중요한 누구들 처럼 왜들 함께 난리들인지ㅉㅉㅉ

"앗살람 알라이쿰"(모두에게 언제나 알라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내말이그말 09/09/30 [15:51] 수정 삭제  
  양은냄비님 말씀이 옳소. 방금 들어온 카더라통신 따르면 시청에서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네요. 허허 아직 방향도 못 정했으면 그집 속사정이 어떤 지경인지 알만 하네요. 근거를 내놓자니 근거가 없고 방관하자니 쳐다보는 눈길들이...참 딱하십니다요 ㅋㅋ...

게다가 시의원들도 벼르고 있댑니다. 그동안 쏟아부은 게 얼만데 근거도 없이 이게뭐냐는거죠. 근거가 있으면 김한영과 안성신문을 고소해야 할 거 아니냐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카데요. 그 많은 바우덕이 예산 집행부말만 믿고 승인해준 의회도 한마디로 배신감을 느끼는거죠. 어디 오랫만에 우리 의원나리들이 밥값 좀 하려나 봅니다. 그런데도 바로 위에 관심가님처럼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하는 양반도 있네요 ㅋㅋ

시의원들이 정식으로 실상을 밝히라고 요구허면 시도 어절 수 없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을 수 밖에 없겄지요. 부정이건 긍정이건. 시의 입장은 저 위에 답론이라ㅓ고 글 올린 사람들처럼 구전이 어떻고 하는 궁색한 변명과는 다른 내용이겠지요. 남의 글 요점을 파악했으면 그 맞게 반론을 해야지 원... 2편댓글 에서도 바우덕이가 경복궁에 갓다는 것을 완벽하게 입증하겠다고 장담한 것 같은데 그러면 그 얘기를 해야지 여기 올린 글이 무슨 근거라고.
글구 예인들이 옥관자를 받앗다는 사실을 안게 뭐 그리 새롭다고 호들갑인지 모르것네.
인터넷만 검색해도 다 나오는 내용인데 ...헐
그건 아는가 몰라 관 주변에서 활동했던 기생 예인들과 남사당패는 근본이 다르다오

그래요 양은냄비님 말처럼 하여간에 기다려 봅시다. 의회가 열리면 뭔가 나오겠지요.
안성인 09/10/01 [16:04] 수정 삭제  
  카더라통신의 주인공은 글쓴이가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연구조사 내용은 안보이고 주워들은 얕은 지식을 이용하여 허점만 파고들려하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나 누나야!!! 09/10/01 [18:42] 수정 삭제  
  안성시청 관계자 여러분!!!
밥줄 끈길까...
똥줄이 타긴 타나 보네용.
그러나...
기달려용..잉
이 누나가가서 해결해 줄테니까.
너희 다 둑었엉
이제 너희들 밥줄 걱정해야 할것이여...
우선 누구의 잘못인지 담당 공무원 구상권 부터 청구해야징...
기둘러...
내년 6월 까지만...
바우덕이연구관 09/10/01 [18:48] 수정 삭제  
  이젠 안성시청이 바우덕이 연구관까지 만든다고 하던데...
맞나여?
이제 갈때까지 갈려나?
나그네 09/10/01 [22:28] 수정 삭제  
  딱 한사람들------
배부르면 아무생각없이 글한자 던져놓으면 이사람 저사람 덧글 올리느라
정신들 없구먼 신문사는 재미 붙어부러넹-----
사둔이 땅사면 배아픈지가 먼옛날이구 지금은 나라 살림두 지역 살림두
하기만 하면 부레이쿠가 사정없이 걸리구...이제는 우리네 조상님이 만들어 놓은 한글에
죽게 되었구먼......
바우덕이 풍물단 사람들보시오 참으로 불쌍들하시오....
여기저기서 민족을운운하고.. 남사당에 역사운운하고...인물운운하고...
창녀라고까지 운운하며 글들을 남발하니 바우덕이 여러분 참으로 불쌍들하시오...
안성에 남녀노소 심지어는 뱃속에 든갓난아이들도 우리네
조상님들이 만들어놓은 풍물소리만 들어도 어깨춤이 덩실덩실...
이정도면 바우덕이 역사와 문화를 안성뿐아니라 세계에까지도 발전이 되었는데...
이제는 심판대에 올라가 민중의 희망이니.. 추앙할인물이니...
창녀니.. 정말한심하기 짝이없오...
신문사에다 글한자락 올려놓으면 다들 신이나서 너도나도 한마디들 하니
역사에 근원지를 가서 사람들 모아놓고 그렇게들 해보시오...



내말이그말 09/10/02 [11:06] 수정 삭제  
  나그네 님 참 딱하시네요...
말씀하신거로 바우덕이 역사와 문화가 세계에까지 발전하게 되었으니 사는 게 좀 나아지셨소? 풍물단 말씀하시는데 그거 운영하답시고 1년에 얼마씩 들어가느지는 아시요?
바우덕이 드라마 만드는데 갇다바치는 돈이면 안성의 초중고 학생들 2년 동안
급식 무상으로 줄 수 있다고 합디다. 문화관광 앞으로 일천억이 들어갔다는데 안성 사람들 가구당 3백만원씩이오. 안성 꼬라지는 보고 사시오? 지금의 평택이나 용인과 비교좀 해보시오. 바우덕이 귀신에게 홀리기 전까지만해도 안성이 그런대로 평택이나 용인과 경쟁할만했다는 사실은 알고 사는거요?
바우덕이 풍물단 사람들 불쌍타고? 아이고 억장 무너지는 말씀 좀 마소. 안성사람들이 없는 돈에 등골이 휘면서 그만큼 대줬으면 이제 돈 좀 벌어오라 카소 마~
그리고 위에 글쓴 사람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해대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나 이게 아니다싶어 쓰는 것이지 나그내 님 생각처럼 아무생각 없이 쓰는 거 아닐거요. ..
그리고 그 위에 안성인. 푸하하하... 안성이 비록 시골 촌동네라고는 하나 인구가 17만이오. 안성이 글쓴이만 사는 동네요? 글쓴사람 말고도 카더라 통신 소식통들 바글바글하다오.
나 누나야, 바우덕이 연구관... 다들 좀 기다려봅시다. 양은냄비 님 말씀처럼 안성시가 답변인지 변명인지 내놀 때까정 지둘러 보자고요... 추석들 잘 지내시고요^^
나그네 09/10/03 [12:11] 수정 삭제  
  내말이 그말님 말씀 잘하셨소....
말씀들이 틀린말은 아니시네요--- 하지만 말이요 난 시민의 한사람으로써
이렇게 생각하오이다...
우리네 안성토박이 님들은 말이오 아주 가까운 옛날부터 안성에
발전하고는 먼사람들이었소 있던 기차역도 없애부렀구 놀이동산두
만들려구 하니 땅값은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속구 땅들은 내놓으려구도
안하구 아파트한번 지을려구해두 누구한사람 안성에 발전을 위해서
적당히 희생 못해주는곳이오
전국을 돌아다녀보시오... 이렇게 기차역까지 없에는 곳이 있나요
인구가 17만이나 되는 도시에서 말이요....
어쩌다 시내에서 술한잔할까해서 시내돌아보면 도심한중앙이
이렇게 낙후된곳도 없네요 정말 안스럽구만요...
그래서 도로공사하니 시민들날리가 났어요 무슨넘에 공사냐구...
이것두 못하게하구 저것두 무하구 뭘하면 땅값은 하늘높은줄 모르고 오르고
그저 아무것두 하지말구 밥 잘먹는데만 신경쓰면되나요...
님들 말이오 바우덕이축제로 인해 많은 장사꾼들 그잠깐의
문화축제에 돈두벌구 마음에 즐거움도 저는 생긴다구 보우...
다들 틀린말씀들은 아니지만 조금씩 양보하고 지역 문화와 모든게
발전해야지 안컷수... 낙후된 안성 공사를 하고 문화 발전시키고 조금더
신경쓰면 밥먹구 살거구 시는 장사치들은 아니잔아요...
적어두 지역 문화 퇴페적이고 못된 문화 만들지 맙시다...
학교샌님 09/10/04 [14:21] 수정 삭제  
  자료들을 몇가지 찾아보니 바우덕이가 경복궁에 가서 대원군에게 뭘 받았다는 건 사실이 아닌 게 분명해 보이네요. 그때 살았던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해요.

김한영 선생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꼭 답해주세요.
3편 글에 나오는 안성기생 변매화는 어떤 기생이었나요? 제가 알기론 과거의 기생들이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어 지는 것으로 아는데요, 변매화는 어디에 속했나요?

안성기생들을 알 수 있는 다른 자료는 없나요?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글쓴이 09/10/05 [16:38] 수정 삭제  
  과거의 안성 기생에 관한 자료는 다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assm.co.kr/sub_read.html?uid=139§ion=sectio§ion2=
http://www.assm.co.kr/sub_read.html?uid=199§ion=sectio§ion2=
http://www.assm.co.kr/sub_read.html?uid=1034§ion=§ion2=

위의 글에서 언급한 변매화와 그 동료들이 일패기생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삼패에 속했다고 할만한 근거도 없습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등의 언급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이패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활동시기가 일제강점기이니 만큼 일패 이패 삼패로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긴 합니다만.

이들 안성 기생과 관련해서 새로이 몇몇 자료를 구하긴 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소개하기는 마땅치가 않고요, 기회가 되면 이들의 행적과 의미를 조명하는 글을 새로 한 편 쓸까 생각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곰고미 22/09/01 [16:30] 수정 삭제  
  오래 전에 이런 논란들이 있었군요. 안성에 이사온지 얼마 안되었고요. 바우덕이에 관심이 많은 일원으로 매우 안타깝네요. 뭐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반론도 재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한가지 몹시 거슬리는 지점은... 제가 알기로 그 시절의 사당패는 거의 매춘을 했지요. 그건 남사당도 마찬가지였구요. 그것을 지금의 도덕적 관점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원해서 천민 광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호구지책이었을 거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옥관자 바우덕이가 조작되고 왜곡되었다 해도 김암덕은 어쨌거나 실존인물이었고 심우성님의 책에도 능력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면 허구는 걷어내더라도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지요. 왜 독립운동가들과 나란히 놓고 얼토당토 않은 비교를 하면서 불행했던 한 여자의 삶을 이리 욕되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후세에 김연아더러 촛불집회 안나갔다고 민주화운동을 했니 안했니 하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닌가요? 정녕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싶다면 열심히 발굴해서 알리십시오. 그것은 그것대로 하면 되지요. 바우덕이는 문화인물로 안성시가 마스코트로 내세우고 있을 뿐인데..... 여튼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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